1. 정오 직전, 마운트카멜의 마지막 순간
1993년 4월 19일 정오 직전, 미국 텍사스 웨이코 외곽의 작은 농장 마운트카멜이 강한 평원의 바람을 타고 거대한 화염에 휩싸였다. 단 20분 만에 50미터 길이의 단층 목조 건물은 잿더미만 남았다. 그 안에는 어린이 25명을 포함한 84명이 갇혀 있었으며, 최종 사망자는 76명에 이르렀다. 51일간 이어진 미 연방의 봉쇄가 가장 비극적인 방식으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자칭 다윗 왕이라 부르던 33세 청년 데이비드 코레시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렇게 한 건물 안에서 사라졌다. 미국 사이비 종교 역사상 단일 사건으로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낸 비극은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끝났는가.
2. 버논 하월에서 데이비드 코레시로
그의 본명은 버논 웨인 하월이었다. 1959년 텍사스 휴스턴에서 14세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학교에서 난독증으로 놀림받던 평범하다 못해 위축된 소년이었다. 그러나 십대 시절 성경을 통째로 암기하기 시작한 후 주변 신앙 공동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81년 그는 텍사스 웨이코에서 안식교의 한 분파인 작은 종교 공동체 다윗파에 합류했다. 그곳에서 그는 점차 지도력을 확장했고, 1990년 8월 캘리포니아 법원에 자신의 이름을 데이비드 코레시로 정식 개명했다. 데이비드는 구약의 다윗 왕에서, 코레시는 유대인을 바빌론에서 해방시킨 페르시아 왕 키루스의 히브리어 발음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자신을 다윗 왕의 후계자이자 마지막 예언자로 선포한 것이었다.
3. 다윗파의 신학과 7개의 봉인
다윗파의 중심 교리는 요한계시록 5장에 등장하는 7개의 봉인이었다. 코레시는 자신만이 그 봉인을 열 수 있는 어린 양이라 주장했다. 그는 매일 밤 신도들을 모아 길게는 15시간 이상 성경 강의를 이어갔다. 신도들 중에는 영국, 호주, 캐나다, 자메이카 출신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일부는 명문대 출신의 고학력자였다. 이 사실은 사이비 종교가 단순히 무지나 가난의 산물이라는 통념과는 다른 측면을 보여주었다. 코레시는 또한 신도들의 결혼 관계를 강제로 해체했으며, 자신만이 모든 여성 신도와 영적 결혼을 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은 후에 미성년자를 포함한 매우 심각한 윤리적 의혹으로 번졌다.
4. 1993년 2월 28일의 새벽 진입
1993년 2월 28일 일요일 오전 9시 30분경, 미 주류담배화기단속국 ATF의 요원 76명이 마운트카멜의 정문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명목은 불법 자동화기 소지 혐의에 대한 수색영장 집행이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코레시는 ATF의 작전 정보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한 지역 언론사의 카메라맨이 진입 한 시간 전 마운트카멜 근처에서 길을 묻다가 미 우체부에게 작전을 누설했고, 그 우체부가 즉시 코레시에게 알린 것으로 추정된다. 진입 직후 양측에서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고, ATF 요원 4명과 다윗파 신도 6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미 연방 역사상 단일 작전에서 가장 많은 ATF 요원이 희생된 날이었다.
5. FBI 인계와 51일의 협상
ATF의 진입 실패 직후 사건은 FBI로 인계되었다. FBI는 텍사스에서 두 개의 독립적인 팀을 동시에 운영했다. 한 팀은 협상팀으로, 코레시 및 다윗파 구성원들과 매일 수 시간씩 전화 통화를 이어가는 임무였다. 다른 팀은 인질구출팀으로, 무력 진압을 준비하는 임무였다. 두 팀은 51일 내내 서로 다른 방향의 압박 전략을 두고 충돌했다. 협상팀은 인내심과 신뢰 구축을 강조했지만, 인질구출팀은 점진적 압박과 위협을 통한 항복 유도를 주장했다. 이 내부 갈등은 후에 의회 청문회에서 가장 큰 논쟁점이 되었다. 그동안 협상 끝에 첫 2주 동안 어린이 21명과 성인 14명, 합계 35명이 자발적으로 건물을 빠져나왔다.
6. 봉인의 책을 다 쓸 때까지
협상의 후반부에는 신학자 두 명 필립 아놀드와 제임스 테이버가 직접 개입했다. 그들은 코레시와 같은 종말론적 신학 언어로 대화하며 그를 설득하고자 했다. 1993년 4월 14일, 코레시는 자신의 변호사를 통해 자필 편지를 FBI에 전달했다. 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7개의 봉인에 관한 글을 모두 마치면 즉시 항복하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학을 책의 형태로 완성한 후 모두 함께 평화적으로 항복하겠다고 약속했다. 신학자 아놀드는 이 약속이 진심이라 판단했으며, FBI 협상팀도 그 견해에 동조했다. 그러나 FBI 인질구출팀과 워싱턴의 결정권자들은 그 약속을 또 다른 지연 전술로 판단했다.
7. 4월 19일 새벽 6시의 CEV
1993년 4월 19일 새벽 6시 직후, 두 대의 컴뱃 엔지니어 차량 CEV가 마운트카멜 외벽을 뚫고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 차량들의 외측 부착물에는 페렛이라 불리는 가스 주입 장치가 장착되어 있었다. CEV는 약 6시간 동안 단속적으로 건물 내부로 다량의 최루가스 CS를 주입했다. FBI는 이 작전이 무력 진압이 아니라 점진적 가스 주입을 통한 평화적 퇴거 작전이라 설명했다. 그러나 마운트카멜 내부에는 어린이 25명을 포함한 84명이 여전히 남아 있었으며, 건물 안에는 환기 시설이 거의 없었다. CS 가스는 좁은 공간에서 고농도로 흡입하면 호흡 곤란과 의식 저하를 일으킬 수 있는 화학물질이었다.
8. 정오 직전의 세 갈래 불꽃
4월 19일 정오 직전인 12시 7분, 마운트카멜 건물 세 곳에서 거의 동시에 불꽃이 솟아올랐다. 강한 텍사스 평원의 바람은 시속 50킬로미터에 가까웠고, 목조 건물은 단 20분 만에 완전히 타버렸다. 그 안에 있던 84명 중 단 9명만이 살아남았다. 사망자 76명 중 25명은 어린이였으며, 그중 14명은 코레시의 친자녀로 추정되었다. 사망 원인은 다양했다. 일부는 화재로, 일부는 추정되는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일부는 매우 슬프게도 어른들에 의한 자기 손에 의한 사망이었다. 일부 어린이 시신은 어머니가 끝까지 안고 있던 자세 그대로 발견되었다. 작은 마을 웨이코의 외딴 농장에서 단 20분 동안 76명의 목숨이 사라진 것이었다.
9. 불은 누가 질렀는가
화재의 원인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국 사회의 가장 첨예한 논쟁 중 하나로 남아 있다. FBI는 다윗파 신도들이 건물 내부 여러 곳에 콜맨 캠핑 연료를 뿌린 뒤 동시에 점화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1993년 의회 청문회와 1999년 특별 검사 존 댄포스의 14개월에 걸친 종합 조사 모두 같은 결론을 지지했다. 그 핵심 근거는 화재 발생 직전 건물 내부에서 녹음된 도청 마이크의 음성이었다. 녹취록에는 “연료를 뿌려라”와 같은 명령형 표현이 다수 등장한다고 보고되었다. 그러나 생존자 9명 중 일부는 다른 증언을 내놓았다. CEV가 진입할 때 충돌 충격으로 건물 안의 등불이 쓰러져 불이 시작되었다는 주장이었다. 두 진술은 정면으로 충돌한다.
10. 1999년 군용 탄피 발견 사건
1993년 사건 직후부터 1999년까지 약 6년 동안, FBI는 마운트카멜에서 발사형 군용 최루가스 탄을 사용한 사실이 없다고 일관되게 부인해 왔다. 그러나 1999년 한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가 회수한 잔해 더미에서 발사형 M651 군용 CS 탄피가 발견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발사형 탄은 가연성 인화 성분을 포함할 수 있어, FBI의 부인은 결정적인 신뢰 위기를 맞았다. 그 직후 1999년 8월 자넷 리노 법무장관이 직접 사실을 인정했고, 같은 해 9월 클린턴 대통령이 특별 검사 임명을 지시했다. 댄포스 보고서는 그 결과물이었다. 보고서는 발사형 탄이 사용된 것은 사실이나, 발사 시간이 화재 발생 4시간 전이며 건물에 직접 명중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신뢰는 이미 깊이 손상된 후였다.
11. 정확히 2년 후의 보복
웨이코 사건의 여파는 그 후로도 미국 사회 전체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사건 발생 정확히 2년 후인 1995년 4월 19일, 오클라호마시티 알프레드 머라 연방 빌딩이 폭탄 테러로 파괴되어 168명이 사망했다. 그 자리에서 어린이 19명도 함께 희생되었다. 범인 티모시 맥베이는 체포 후 자신의 행동이 웨이코에 대한 보복이었다고 명시적으로 진술했다. 그는 1993년 봉쇄 기간 중 마운트카멜 근처에서 항의 전단을 직접 배포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한 정부 작전이 또 다른 비극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미국 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사례였다. 이 충격은 미 연방 정부의 인질 협상 매뉴얼을 전면 개편하게 만들었으며, 1995년 이후 FBI는 인질구출팀의 권한을 협상팀 아래로 종속시키는 구조 개편을 단행했다.
12. 사이비는 왜 매력적인가
웨이코 사건이 던지는 가장 어려운 질문은 한 청년이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을 한 농장에 모을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다윗파 신도 중에는 영국 명문대 출신, 호주의 음악가, 미국 변호사 가족, 캐나다 의대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무지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았다. 사회심리학자 로버트 리프턴은 자신의 저서 사상개조와 전체주의 심리학에서 사이비 종교의 영입 패턴을 8가지로 분류했다. 환경 통제, 신비한 조작, 순수성의 요구, 자백, 신성한 과학, 언어의 재구성, 인격의 우위, 존재의 분배 등이었다. 다윗파는 이 8가지를 거의 모두 충족했다. 코레시는 신도들을 외부 사회와 단절시키고, 매일 15시간의 강의로 사고 패턴을 재구성했으며, 자신만이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평범한 사람도 이 8가지 조건이 모두 갖춰진 환경에 충분히 오래 노출되면 변할 수 있다는 것이 리프턴의 결론이었다.
13. 마치며: 30년이 지나도 답이 없는 질문
1993년 4월 19일 정오의 그 화염은 다윗파라는 한 사이비 종교 공동체를 완전히 소멸시켰지만, 의문은 단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다. ATF는 왜 정보가 누설된 작전을 강행했는가. FBI는 왜 6시간 동안이나 좁은 공간에 가스를 주입했는가. 불은 정말 다윗파 신도들이 직접 질렀는가, 아니면 CEV 진입의 부수 효과였는가. 협상이 한 주만 더 길어졌다면, 코레시가 자신의 책을 완성한 후 약속대로 항복했더라면, 어린이 25명은 살아남았을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한 청년이 자신을 다윗 왕이라 부르며 평범한 사람들을 어떻게 그 외딴 농장 한곳에 모을 수 있었는가. 마운트카멜의 잿더미 위에 남은 이 다섯 가지 질문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국 사회의 가장 어려운 숙제로 남아 있다. 어떤 비극은 진실이 밝혀진 후에도 그 무게가 줄어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