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째 닫혀 있는 단 한 권의 책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암호해독가들이 600년 동안 단 한 줄도 읽어내지 못한 책이 있다. 이름은 보이니치 필사본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적국의 암호를 통째로 무너뜨린 전설적인 해독가조차 이 책 앞에서는 완전히 무릎을 꿇었다. 240장의 낡은 양피지에는 지구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문자가 빼곡히 적혀 있고, 그 사이사이에 그려진 식물은 세상에 실재하지 않는 종이다. 대체 누가, 무엇을 감추기 위해 이런 책을 만들었을까. 그 답을 아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단 한 명도 없다. 이 글에서는 그동안 밝혀진 사실과 끝내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를 하나하나 짚어본다.

손바닥만 한 책 속의 미지의 세계
보이니치 필사본의 크기는 손바닥보다 조금 큰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200장이 넘는 페이지가 촘촘히 채워져 있다. 페이지를 넘기면 부드럽게 이어지는 곡선 형태의 문자가 마치 강물처럼 흐른다. 그 문장 사이사이에는 뿌리와 잎이 뒤엉킨 기묘한 식물 그림이 등장하고, 어떤 페이지에는 별과 원이 복잡하게 얽힌 천문도가, 또 어떤 페이지에는 초록빛 물속에 잠긴 작은 인물들이 담겨 있다. 그림의 소재는 크게 식물, 천문, 인체, 약학의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학자들은 이 구성이 중세 유럽의 백과사전과 닮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흥미로운 점은 글자와 그림이 분명 서로 짝을 이루는 듯 보인다는 사실이다. 특정 그림 옆에는 특정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러나 그 연결고리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무도 알아내지 못했다. 분명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책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정작 그 내용은 여전히 짙은 어둠 속에 잠겨 있다.
과학이 밝혀낸 것과 밝히지 못한 것
학자들은 이 책을 과학의 힘으로 파헤치기 시작했다. 양피지의 방사성 탄소를 측정한 결과, 이 책이 만들어진 시기는 1400년대 초반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위조 가능성을 상당 부분 걷어내는 중요한 근거였다. 페이지에 적힌 글자는 대략 17만 자에 이르고, 서로 다른 기호는 20종류 남짓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 기호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진 낙서가 아니라 실제 언어처럼 일정한 규칙을 따른다는 점이었다.

특정 글자가 특정 자리에 반복되는 통계적 패턴이 또렷하게 나타났고, 단어가 등장하는 빈도 역시 자연스러운 언어의 법칙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언어학자들이 사용하는 여러 통계 지표를 대입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 해독이 가능한 암호여야 했다. 그러나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실제 의미는 끝내 드러나지 않았다.
책에 이름을 준 남자, 윌프리드 보이니치
이 책의 이야기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12년, 이탈리아의 한 오래된 별장에서였다. 희귀 서적을 사고파는 상인 윌프리드 보이니치는 먼지 쌓인 상자 속에서 낡은 가죽 표지의 책 한 권을 발견했다. 페이지를 펼친 순간, 그는 평생 본 적 없는 문자와 마주했다. 노련한 상인이었던 그는 이 책이 예사로운 물건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 순간부터 이 책은 그의 이름을 얻어 보이니치 필사본이라 불리게 되었다. 보이니치는 남은 평생을 이 책의 비밀을 밝히는 데 바쳤다. 당대의 학자들에게 사본을 보내 자문을 구했고, 스스로도 수많은 밤을 새웠다. 한때 그는 이 책이 중세의 위대한 학자가 남긴 비밀 연구 노트라고 믿었다. 그 주장을 뒷받침하려 오래된 편지와 기록을 뒤졌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끝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단 한 글자도 읽어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그가 풀지 못한 수수께끼는 그렇게 고스란히 온 세계로 넘어갔다.
전설의 암호해독가마저 무너지다
미국 최고의 암호 기관을 세운 인물 윌리엄 프리드먼은 이 책과 평생을 씨름했다. 그는 세계대전에서 수많은 적국의 암호를 깨뜨린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그의 손을 거치면 아무리 복잡한 암호도 결국 무릎을 꿇곤 했다. 그런 그조차 이 책 앞에서는 번번이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수십 년에 걸친 연구 끝에 그는 이 책이 인공 언어를 만들려던 초기의 시도라고 조심스럽게 결론지었다. 즉, 자연 언어를 암호화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없는 언어를 새로 설계했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그 언어가 정확히 무엇인지, 어떤 원리로 만들어졌는지는 그마저도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세계 최고의 전문가가 남긴 것은 답이 아니라 또 하나의 커다란 물음표였다.
네 가지 가설, 그러나 모두 벽에 부딪히다
학자들은 이 책의 정체를 두고 크게 네 가지 가설을 내놓았다. 첫 번째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사기라는 주장이다. 누군가 부유한 수집가에게 비싸게 팔기 위해 의미 없는 기호를 그럴듯하게 채워 넣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 의미 없는 기호가 어떻게 언어의 통계 규칙을 따를 수 있는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두 번째는 지금은 사라진 미지의 언어를 기록했다는 설명이고, 세 번째는 실제 언어를 복잡한 규칙으로 암호화했다는 주장이다. 마지막은 어느 약초 연구자가 자신만의 비밀 기호로 치료법을 적어두었다는 이야기다. 각각의 가설은 나름의 근거를 갖추고 있어 한때는 유력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어느 하나도 완벽하게 증명된 것은 없다. 모든 가설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두꺼운 벽에 부딪혔다.
가짜라기엔 너무 정교한 모순
연구자들이 가장 혼란스러워한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만약 이 책이 아무 의미 없는 가짜라면, 글자들은 무작위로 흩어져 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통계를 내보니 이 문자는 진짜 언어가 지닌 특징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었다.

자주 쓰이는 글자와 드물게 쓰이는 글자가 뚜렷이 나뉘었고, 단어의 길이 분포까지 자연스러운 언어와 똑같았다. 게다가 어떤 단어는 특정 그림 옆에서만 유독 자주 나타났다. 이는 글자와 그림이 실제로 연결되어 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가짜라기엔 너무 정교하고, 진짜라기엔 세상 어떤 언어와도 맞아떨어지지 않는 이 모순이 600년째 학자들을 붙잡고 있다.
600년 동안 손을 바꾼 책의 행로
이 책이 걸어온 길을 따라가면 수수께끼는 더욱 깊어진다. 양피지가 만들어진 것은 1400년대 초반이지만, 그 뒤로 수백 년 동안 이 책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짙은 안개에 싸여 있다.

기록에 다시 등장한 것은 1600년대다. 유럽의 한 황제가 큰돈을 주고 이 책을 사들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황제조차 궁정의 학자들을 총동원했지만 끝내 아무 성과도 얻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1912년 보이니치의 손에 들어왔고, 1969년에는 미국의 한 대학 도서관에 기증되어 오늘날까지 안전하게 보관되고 있다. 2009년 과학자들이 마침내 제작 시기를 규명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내용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답이 아니라 질문만 늘어난 셈이다.
컴퓨터와 인공지능도 열지 못한 문
현대의 연구자들은 컴퓨터와 인공지능까지 동원해 이 책에 다시 도전했다. 수많은 글자를 통계로 분석한 한 언어학자는 이 문자가 절대 무작위 낙서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그는 글자들이 실제 문장처럼 정보를 담고 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인공지능은 이 문자가 어떤 언어와 구조가 비슷한지까지 조심스럽게 추정해 냈고, 어떤 연구팀은 몇몇 단어가 식물의 이름일지 모른다는 대담한 가설까지 내놓았다. 그러나 그 어떤 분석도 실제로 한 문장을 온전히 번역해 내지는 못했다. 최신 기술도, 인간의 집념도 문 앞까지는 다가갔지만 끝내 그 문을 열지는 못했다.
숫자로 보는 완벽한 실패
지금까지 이 책이 남긴 숫자들을 정리하면 그 무게가 더 크게 다가온다. 책이 만들어진 지는 이미 600년이 넘었다. 도전한 암호해독가와 학자는 수백 명에 이르지만, 완벽하게 해독에 성공한 사람은 정확히 0명이다.

온전히 번역된 문장은 아직 단 하나도 없다. 물론 해독에 성공했다고 주장한 사람은 이따금 나타났다. 그러나 학계의 엄격한 검증을 통과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두뇌들이 100년 넘게 매달렸는데도, 이 책은 여전히 단 한 줄의 비밀조차 내주지 않았다. 심지어 최근에는 상금을 걸고 전 세계의 아마추어 해독가들이 뛰어들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실패의 기록만 두껍게 쌓여갈 뿐, 정답에 다가섰다는 확실한 신호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인류가 이토록 오래, 이토록 많은 사람이 함께 실패한 수수께끼는 결코 흔치 않다.
흔적조차 지워버린 저자
어쩌면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은 보이니치도, 프리드먼도 아닌 책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600년 전 누군가는 엄청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이 책을 만들었다.

존재하지 않는 식물을 그리고, 낯선 별자리를 배치하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문자로 페이지를 가득 채웠다.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순간의 흐트러짐도 없이 일관된 규칙을 지켜가며 완성했다. 그 사람은 이 책을 누구에게 보여주려 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아무도 읽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을까. 만든 이의 정체도, 목적도, 심지어 그런 사람이 정말로 있었는지조차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 책은 자신을 만든 사람의 흔적마저 완벽하게 지워버렸다.
마치며: 영원히 닫힌 비밀일까
600년이 지난 지금도 보이니치 필사본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세계 최고의 두뇌들이 달려들었지만, 이 책은 자신의 비밀을 단 한 조각도 내주지 않았다. 어쩌면 이 책은 애초에 영원히 풀리지 않도록 설계된 것인지도 모른다. 정교하게 꾸며진 사기극일 수도,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지혜의 기록일 수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뿐이다. 인류가 만든 가장 오래된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눈앞에서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 새로운 기술이 이 책의 첫 문장을 열어젖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 전까지, 보이니치 필사본은 여전히 인류에게 던져진 가장 우아하고 잔인한 질문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당신은 이 책의 정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